소사댁이 만난 소사사람들

제목 더불어 사는 삶을 꿈꾸다 (홍주혜헤어디자인 원장 홍주혜)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15.07.21 조회수 2755

더불어 사는 삶을 꿈꾸는 헤어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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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연고도 없이 친구 하나 믿고 부천으로 이사를 와서 20년 만에 소사본1동 마당발이 된 여인, 그가 바로 홍주혜 헤어디자인홍주혜 원장이다. 정붙이고 살게 될 곳이라서 그랬는지, 그녀는 소사본1동 동사무소 뒤에 있던 가게를 보자마자, 바로 계약을 하고, 같은 건물에 집까지 구했다.

 

웃음 하나로 시작한 부천에서의 새로운 인생

서울 연세대학교 앞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던 그녀는 건물주가 갑자기 가게를 비워달라고 해서 급하게 가게를 정리했다. 건물주가 그 공간을 쓴다고 해서 권리금조차 받지 못했다. 당시 그녀는 간호조무사로 일하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서, 미용실을 차려 막 자리를 잡아가던 중이었다.

둘째 아이를 가져 배는 불러오고, 여윳돈도 없어 눈앞이 캄캄했다고 한다. 그때 부천에서 옷가게를 하고 있던 친구가 근처에 미용실을 할 만한 자리가 났다면서 가게를 소개해주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마음고생 좀 했죠. 외지에서 들어와 장사를 하는 저를 이웃들이 반길 리가 있겠어요. 알게 모르게 텃새도 심했고, 서울과는 다른 영업 관례 때문에 고생도 많이 했어요. 동종 업계에 일하면서도 그런 걸 미리 일러 주지 않은 주변 사람들이 모두 텃새를 부리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하지만 제가 성격이 긍정적이에요. 갓 태어난 딸을 업고, 더 웃고 더 열심히 하면 다들 알아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살았죠.”

새로운 터전에 적응하는데 3년쯤 걸렸다. 가게와 집안일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앞 건물에 살던 이웃이 뭐가 그렇게 즐거워서 항상 웃느냐고 물어볼 정도였단다. 어쩌다 아침에 기분이 상해 집을 나오다가도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이웃의 말에 그녀는 또 웃었다. 실제로 취미와 특기가 모두 미용인데, 그 미용을 업으로 삼았으니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도 처음에는 이 일이 천직인 줄 몰랐다고 한다. 양재 학원과 미용 학원을 두고 고민하다가, 치수를 재고, 숫자를 계산하는 것이 싫어서, 우선 미용을 배워보기로 했던 것이었는데, 자신의 적성에 딱 맞아 떨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가족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미용 일을 왜 하느냐고 탐탁지 않아 했어요. 그런데 시대가 바뀌어 원장님소리를 듣고, 헤어디자이너 대접까지 받으니, 지금은 잘 했다고 하세요.”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루 종일 업고 일하며 키운 둘째가 자주 아팠기 때문이다. 가게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서 직원을 셋이나 두고 있었지만, 손님이 원장이 직접 해주기를 바라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는 아픈 아이를 업고 가위를 들어야 했다. 그렇게 쉼 없이 10년을 일해서, 지금의 자리로 가게를 옮겼다.

몸을 사리지 않고 너무 일을 많이 한 탓에 3년 전에는 그녀가 병원 신세를 졌다. 병원에 갔더니 십수 년 동안 쌓인 피로가 그 원인이라고 했단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손님 파마를 하다가, 겨우 롤 세 개를 말고 쓰러져버린 것이다. 그렇게 응급실 신세를 지고서도 곧바로 돌아와 계속 일을 했다. 최근에도 손님이랑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눈앞이 희뿌해져서 가게 안에 웬 안개냐하고 쓰러져 응급실을 가야 했다.

그렇게 악착같이 일을 하면서도, 그녀는 겉보다는 안을 채우며 사는 것이 좋단다. 1999년 숙명여대 평생교육원 최고경영자 과정을 시작으로, 메이크업, 경영학 등을 배우느라 3년을 정신없이 보내기도 했다.

 

미용으로 세상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그녀의 꿈

그녀는 봉사 활동에도 열심이다. 15년째 장봉도로 꾸준히 봉사활동을 나간 것이 알려져서 경기도 도지사상을 받기도 했다.

봉사를 하다 보면, 오히려 내가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거운 몸으로 갔다가도 돌아올 때는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져서 와요.”

일주일에 하루 쉬고, 나머지 엿새를 늦게까지 일하면서도, 매월 셋째 주 화요일을 아예 봉사활동 가는 날로 정해두고 있다. 이외에도 크고 작은 지역의 행사가 있을 때나, 다른 곳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지인들이 도움을 청하면 주저하지 않고 메이크업 박스를 챙긴다.

한 번은 영정사진 촬영 봉사활동을 나가서, 어르신들 메이크업을 하다가 탈진해 쓰러진 적도 있었다. 기왕에 하는 일, 내 일이라 생각하고 끝까지 하자는 맘에 버틴 것이 화근이었다. 마침 함께 봉사를 하던 의료진들 덕에 겨우 안정을 찾았다.

그녀는 가족과 함께 봉사활동을 한다. 꾸준히 봉사활동을 하는 그녀 곁에는 늘 남편과 아이들이 있다. 그녀는 아이들이 어렸을 적부터 봉사활동에 함께 데리고 나갔다. 그녀가 미용 봉사를 하는 동안, 아이들은 청소를 했다. 청소를 하며 엄마를 따라 다녔던 큰 딸은 지금 그녀와 함께 미용실에서 일을 하고 있다.

요즘은 두 모녀가 해밀도서관 시각장애인 센터에서 미용 봉사를 하고 있다. 직접 기른 거라며 휴지에 곱게 싸서 챙겨 준 방울토마토 몇 알, 눈이 보이지 않아 뭉개진 지도 모르고 봉지 째 전해주는 바나나,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그 분들의 마음이 그녀에게는 세상을 살아가는 큰 힘이 된다.

노후에는 전원 카페 같은 미용실을 하고 싶어요. 봉사하는 마음으로 일할 수 있는, 싼 가격으로 머리도 하고, 사랑방처럼 들러서 지난 얘기를 나누는, 그런 미용실을 여는 게 꿈이에요. 그 전에 메이크업 박스 하나 들고 전국의 오지를 다니며, 어르신들 머리도 해드려야죠.”

만삭의 몸인 그녀를 쉴 수 없게 했던 그녀의 꿈은 미용으로 세상에 보탬이 되는 것이다. 본래 자기 것을 챙기는 성격도 아니지만, 이제 가게도 장만했고, 자식들도 다 컸으니, 이제 그녀는 한 템포 쉬어가는 인생을 꿈꾸고 있다.

남들처럼 욕심도 차리고, 명예를 얻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한 때는 미용 관련 회사에 초빙되어 강의를 하기도 했고, 현장 경력과 강의 경력이 쌓이면서 교수 자리를 제안받기도 했다. 그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어줍지 않게 명예를 좇다가, 정작 하고 싶은 일도 못 하고, 집안 꼴이 어지러워지겠다 싶어서 결국 거절을 했다.

 

더불어 사는 삶을 이루다

처음엔 텃새 때문에 마음고생을 좀 했지만, 꾸준히 일하며 서로 마음을 열고나니, 모두가 다 좋은 이웃이었다. 누가 부천에 대해 물으면, 주민들이 소박하고 정이 많다고 주저 없이 말하지만, 그녀는 요즘 들어 갈수록 동네 인심이 사나워져 조금은 걱정이다.

친구 하나밖에 없던 부천에서 스무 해를 살면서 참 많은 사람을 알게 되었단다. 지금의 자리로 가게를 옮겨 개업하던 날에도 화분이 너무 많이 들어와 길 가던 사람들이 꽃집을 연 것이냐고 물을 정도였으니까. 그 때, 주민자치위원회에서 함께 일한 배경자 시인이 써준 시가 아직도 그녀 가게 벽을 지키고 있다.

 

언제나 웃음으로 하루를 조각하는

가냘픈 사랑을 그대는 알고 있나

가끔은

소중한 하루

네게서 머물리라.

 

경기 불황으로 미용실 손님이 부쩍 줄어들고, 젊은 일손을 구하기가 힘들어 마음이 편치 않지만, 그녀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다. 일을 하면서 홍주혜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지만, 아버지가 지어준 그녀 이름은 홍인이다. 넓을 홍()에 어질 인(), 그녀는 출근할 때마다 가게에 걸린 액자를 보며,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 뜻을 새기며, 널리 어질게 살리라 마음을 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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