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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울↔개성, 그 버스기사가 되고 싶다 (소신여객 운전기사 조덕기)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15.07.21 조회수 2671

서울개성, 그 버스기사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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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최고를 자랑한다는 인구밀집지역인 부천에서, 구도심에 폭이 좁은 도로가 많아 운전하기 힘들다는 부천에서 25년째 운전대를 잡고 있는 이가 있다. 소신여객 조덕기 기사가 바로 그다. 그 오랜 세월을 운전을 하다보면, 사람이 모나지기도 할 텐데, 그는 너무나 겸손하고, 수줍음이 많은 사내였다.

 

광주, 부산, 인천을 거쳐, 부천 소신여객에 몸을 담다

광주에서 태어났어요. 중학교만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가지 않았죠. 빵 공장과 이발소에서 일했습니다. 일을 하면서 2종 면허증을 땄는데, 1971년에 운 좋게도 미8군 카추샤로 입대하게 됐지요. 남들은 군대가 힘들다고 하지만, 군대만큼 편안한 생활을 내 평생에는 다시 하지 못할 겁니다.”

그는 용산에서 운전병으로 36개월을 복무했다. 군 제대 후에는 고향에서 화물차 운전을 했다. 그러다가 1975년 말부터 광주에서 시외버스를 운전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의 버스 운전 인생이 시작되었다.

처음 시작한 게 금성여객 시외버스였어요. 지금은 한일여객으로 바뀌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거기서 3년 동안 일했어요. 군대에서 친하게 지냈던 고참이 부산에 살고 있었는데, 그냥 그 친구와 같은 도시에서 살고 싶어서 광주를 떠나 부산으로 갔어요. 거기서 116번 시내버스를 운전했어요. 그렇게 부산에서 6년 동안 살았네요. 제 유일한 벗이었는데, 작년에 영원히 못 볼 길로 돌아갔어요.”

부산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결혼식은 처가가 있는 강원도 횡성에서 전통혼례로 치렀다. 80년대 당시만 해도 전통혼례를 하는 사람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는데,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전통혼례를 원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창호지에 구멍을 뚫고 첫날밤을 훔쳐보는 영화에 나옴직한 풍경을 연출하며 그렇게 결혼을 했단다.

집사람 형제들이 당초에는 열두 명이었는데, 열 명이 어릴 적에 다 병으로 죽었데요. 열 살 많은 오빠하고 집사람, 이렇게 둘만 남았던 거죠. 장인, 장모가 전형적인 시골 분들이었고, 딸을 애지중지하셨나 봐요. 그래서, 효도해드린 셈 치자 생각하고, 전통혼례를 하자는 말에 그대로 따랐습니다. 장인어른은 가끔 우리 집에 오셔서 같이 지낸 시간이 많았는데, 5년 전에 돌아가셨고요.”

부산에서 일하는 것이 처음에는 평탄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힘들어 졌다고 한다. 아직도 이유를 모르겠는데, 자꾸 운전이 거칠어서 작은 접촉사고가 많았다. 안 되겠다 싶어서, 1984년에 부평으로 올라왔다. 부평에서도 버스 운전을 계속했다. 1년 동안 부평여객에서 일을 했는데, 당시 운전기사들 사이에서 부천의 소신여객이 기사 대우가 좋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신여객에서 일이 하고 싶어서 부평여객을 그만두고 8개월을 쉬었어요. 19861월에 소신여객에 입사해 지금까지 소신여객 11번 버스를 운전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말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아무튼 소신여객에는 따뜻한 분위기 같은 게 있어요. 일하기 편했지요.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80년대 당시에는 버스노선이 그리 많지 않았어요. 버스 안이 늘 콩나물시루 안 같았지요. 그래서 회사가 잘 나가게 되었을 거예요.”

 

나는 오랫동안 운전대를 잡고 싶다

평탄한 인생을 살아온 그에게 큰 위기가 찾아 왔다. 2000년에 평소 친하게 지내던 회사 관리직 직원에게 자신의 집을 담보로 잡히고, 은행융자를 받아 7천만원을 빌려주었는데, 빚이 너무 많아 뒷감당을 못하게 되자 집에 휘발유를 뿌린 후 불을 지르고 자살을 해버린 것이다.

그 사건은 모든 뉴스에 방송될 정도로 유명한 사건이었죠. 당사자가 죽었으니 저는 돈 받을 방법이 없었어요. 평생 모은 재산을 다 날렸으니, 기가 막혀서, 화도 안 나고, 말도 안 나왔어요. 반년 동안 운전대를 잡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포기했어요. 그래서 다시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좋은 일을 한다고 했는데, 그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담보로 잡힌 집을 은행에 빼앗긴 것이다. 중간 정산한 퇴직금을 가지고 겨우 빌라 반지하를 얻어서 살아야 했다. 지금도 그는 그 집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요즘 더 큰 고민이 생겼다. 내년 1월에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내년 115일에 제가 만 예순이 되어서, 회사 규정에 따라 정년퇴직을 해야 해요. 작년 임금협상 때, 노조에서 퇴직 연령을 3년 더 연장하는 방안을 회사와 협의했는데, 결국 합의가 되지 않았어요. 내년부터 매달 국민연금 83만원을 받고, 퇴직금은 12년 치를 받는데, 정확히 얼마인지 모르겠어요. 우리 집은 한 달에 최소 150만원 수입이 있어야 하고, 좀 여유 있게 살려면 200만원은 되어야 하는데 걱정이에요. 국민연금 83만원은 노후보장으로는 턱없이 부족해요. 정년퇴직 후에도 5년 정도는 더 일을 하고 싶어요. 버스기사 정년이 65세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는 서울 시내버스 기사를 부러워했다. 서울은 시내버스 기사가 거의 준공무원이기 때문이란다.

평생 동안 운전대를 잡았기 때문에 달리 잘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가능하다면 마을버스를 운전하고 싶은데, 큰 일 이네요.”

그의 말이 너무나 아프게 들렸다. 평범한 시민인 그가 바라는 것은 큰 것도 많은 것도 아니다. 최소한으로 먹고 살기 위한 일자리다.

 

광주, 부산, 인천, 부천 찍고 개성으로

그는 계속해서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자리만 있다면 어디라도 달려가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남북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만약 남북통일만 된다면, 아니, 남북자유왕래만 실현해도, 서울과 개성을 연결하는 직행버스가 생기겠지요. 그러면 갑자기 많은 버스기사가 필요할 것이고, 저도 서울에서 개성까지 가는 버스를 운전하고 싶습니다. 단순히 제 입장에서만 생각해도, 남북통일은 반드시 해야 합니다. 이념이 밥 먹여 줍니까? 지금 한국경제와 세계경제가 다 안 좋아요. 우리가 이 위기를 타개하는 방법은 통일 밖에 없어요. 이제 이념 이야기는 그만 하고, 우리가 먹고 살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통일을 해야 합니다.”

40년을 운전대만 잡고 살아온 이가 있다. 그는 버스로 광주, 부산, 인천, 부천을 찍고, 이제 개성을 찍고 싶다고 한다. 물론 그는 실향민이 아니다. 대학을 다녀본 적도 없어서, 정교한 논리로, 거대 담론으로 통일을 말하지 않는다. 그에게 통일은 일과 밥이다. 놀랍지 않은가, 이렇게 통일이 가까이 와 있는 사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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