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사댁이 만난 소사사람들

제목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는 팔방미인 예술가 (서양화가 김야천)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15.07.21 조회수 3268

더불어 사는 삶을 꿈꾸는 팔방미인 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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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야천 작가는 화가이자 시민운동가다
. 팔방미인이라 할 만큼, 해온 일도 많고, 하고 있는 일도 많다. 그래서 타이틀도 많다. 화가이자 도시조형 연구소 대표, 부천시민연합 이사, 부천미술협회 이사, 한국미술협회 국제 위원회 본부장, 부천남중학교 운영위원 등 일일이 셀 수가 없을 정도다.

그의 화실 풀빛그림터에 들어서면 걸리버 여행기 소인국에 들어선 듯한 착각마저 든다. 유치원생에게 맞을 법한 작은 의자와 테이블, 그림 소품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체구가 작은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다.

그는 우리네 전통 색상인 오방색, 동서남북 사방과 중앙에 맞춘 황(), (), (), (), ()색을 즐겨 사용한다. 그의 명함에는 봄기다리기라는 작품이 인쇄되어 있는데, 원색의 아크릴 물감과 금분, 은분을 사용했는데도 도통 화려하거나 튀어 보이지 않는다. 각각 떼어 놓고 보면 화려해도, 모아놓고 보면 자연스레 어울려서, 오히려 차분하고 수수한 멋을 낸다. ‘상생을 고민하는 그에게 참 잘 어울리는 색상인 것이다. 그는 화려하면서도 뛰지 않는 오방색처럼, 자유로우면서도 수수하게 산다.

 

벽화, 주민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예술 수단

소사구민이라면 그가 그린 벽화를 한 번쯤은 봤을 것이다. 심곡본동 부천남초등학교 앞 골목의 벽화가 그것이다. 회색 담벼락과 가파른 계단으로 삭막했던 그 골목이 2009년부터 벽화와 색색의 타일들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는데, 그가 펄벅 문화마을조성사업에 함께 참여해 완성한 작품이다.

딱히 고민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하고 싶어서 한 일이에요. 캔버스 값 따로 들이지 않고, 주민들이 관람객으로 이미 확보된 동네 담벼락에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아요.”

말은 이렇게 해도 그냥 재미로 하는 일은 아닐 터이다.

그는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서 미술을 전공하면서 격동의 80년대를 보냈고, 876월 민주항쟁과 노동운동, 시민운동의 현장에 있었다. “운동가라고 할 것까진 없고 그냥 관심사에 맞게 움직였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그는 시민 없는 시민운동에 대한 고민의 끈을 결코 놓지 않았다.

다들 풀뿌리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데, 정작 지역에서는 풀뿌리 보수주의가 더 잘되는 이유가 뭘까?’ 그는 그 이유를 거대 담론에 익숙했던 80년대를 지나고 나서도, 여전히 과대한 사이즈에 집착하며 주민들의 실생활에 다가가지 못한 탓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화가로서 찾은 답이 바로 벽화, 그림을 통해 사람들의 생활 가까이에 접근하는 것이었다. 마침 참여정부 들어 공공미술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지원이 확대된 것이 힘이 되기도 했다.

예술가 특유의 젠 체 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를 탐탁지 않아 하는 주위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유인으로 산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규모 있는 공공미술 사업을 할 때면, 예술을 예술로 혹은 주민을 주민으로 두지 않고서, 내 편 네 편으로 가르는 이들로부터 이런저런 훼방이 오기도 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부천에 큰 역사를 남긴 펄벅 여사를 늦게나마 기릴 수 있게 한 펄벅 문화마을조성의 첫 삽도 어쩌면 그의 이런 성정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왜 부천이냐고요? 누나가 이쪽에서 살다 보니, 대학 때부터 통학을 하면서 여기 살았죠. 부천이 좋은지 나쁜지 생각할 틈도 별로 없었고, 학교도 한 시간이면 갔으니까 통학이 힘든 거리도 아니었고요.”

젊은 날의 그가 부천에 둥지를 튼 것은 80년대 초반의 일이다. 지금이야 부천이 문화예술이나 시민운동 어느 하나 빠질 것 없이 구색을 갖춘 도시가 되었다지만, 80년대 초반에 논밭이 펼쳐져 있던 변두리 부천이 홍대미대생눈에 차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껏 그가 부천 품에 안겨 있는 것은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조건이 받쳐 주는 대로 움직이는 그의 순박한 성품 덕일 것이다.

지금은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화가가 된 그의 삶의 여정에서 펄벅 거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혼자가 아닌 주민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과 예술을 구현했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그 수단으로 벽화를 선택하고, 심곡본동 주민자치위원회 위원들과 부천남초등학교 학부모들이 함께 색을 칠하고 타일을 붙여서 모든 주민들과 함께 향유할 수 있는 예술작품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남다른 의미였다.

어릴 적부터 미술을 좋아했어요. 미술에 소질이 있다는 이야기도 여러 번 들었는데, 집이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미술을 공부할 기회가 많이 없었던 저에게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학급 환경미화를 맡겨주셨어요. 실력을 발휘할 계기를 만들어 주신 거죠. 그뿐만 아니라 환경미화를 마치고 남은 재료들을 집에 가져가 마음껏 쓸 수 있도록 해주었어요. 그때 받았던 것 중에서 피닉스 크레파스를 잊을 수가 없어요. 가난했던 시골 마을에 이렇다 할 학용품을 갖고 있는 아이가 학급의 반도 채 안 되었거든요. 그런데 선생님이 금색과 은색이 들어 있던 마흔 여덟 가지에 이르는 색상을 갖춘 고급 학용품이었던 피닉스 크레파스는 가장 소중했던 물건이었죠.”

가난한 학생을 보듬었던 은사님의 마음을 남김없이 받을 수 있었던 그 금색 은색의 크레파스, 마침 오방색에서 맡은 방위도 한가운데와 서쪽이다. 가진 것 없는 시골 아이의 마음이 풍요롭게 차도록 찬란하게 빛나면서도 다른 크레파스들과 어울렸던 금색과 은색의 빛깔이, 상생을 꿈꾸는 지금의 그를 낳은 것이다.

피닉스 크레파스로 당진의 풍경을 그리며 보았던 서해의 노을, 그 노을빛이 서해에서 멀지 않은 부천에 자리 잡은 김 작가의 작업실을 비추는 시간이 바로 그가 창작욕을 다잡는 시간이다. 모두가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그는 어제와 달리 상생하는 내일을 꿈꾼다.

 

작가의 자율성을 함양하는 문화예술정책이 필요한 시기

매일 같은 노을을 보며 다른 내일의 아침을 기다리는 것이 지난한 일이듯, 오늘을 살면서 세상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것 또한 지난한 일일 것이다. 그것도 사람들을 강제할 수 있는 정책이나 제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술을 통하고 마음을 통해서 세상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것은 더 말해 뭐하겠는가. 오늘을 아무리 열심히 산다 해도 그렇고, 그것이 혼자 먹은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면 더더욱 그렇다.

재미있고 돈 덜 드는 일이라 어려울 것 없다고 말은 하지만 벽화를 통해, 그리고 공공미술을 통해 사람들 가까이로 다가가는 것이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펄벅 문화마을 조성 사업이 그랬듯, 어느 정도의 규모가 되는 일은 아직까지 정부의 지원에 기대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데, 정책이라는 것이 어디 예술가의 마음을 따라올 수 있는 것이던가.

중앙정부나 지자체의 지금 같은 지원 방식은 작가들의 자율성을 갉아 먹으면 갉아 먹었지 창작욕을 함양할 수가 없어요. 턴키방식(turn-key)으로 지원하고, 결과물이 나쁘다고 다음에 지원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예술작품이 나올 수 있겠어요? 하지만, 불편한 구석이나 불만이 있다고, 제가 품은 꿈을 쉽사리 내려놓을 수도 없는 일이잖아요.”

현장에서, 그것도 소위 중앙이 아닌 지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로서 답답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참여정부 당시 공공미술에 대한 지원이 확대되고, 그것이 중앙 무대에서 어느 정도 빛을 볼 무렵, 바꾸어 말하면 아직 지역에서는 그 빛을 볼 수 없었던 때, 정부가 바뀌면서 정책은 달라졌다. 의미 있는 정책의 파급 효과가 자신의 무대인 부천에까지 올 수 있기를 기다리며 눈여겨본 것들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이다.

중앙 정부뿐만 아니라 지방자치단체 역시 수장의 임기 내에 성과를 올리는 데에 급급하다 보니, 단기간 내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어려운 문화예술 분야는 이리저리 바뀌는 정책에 휘둘리기 십상이다. 정책의 지속성이 떨어지는 문제만 있는 것도 아니다. 지원을 받다 보면 행정 처리를 해야 하는데, 이것 역시 만만치가 않다. 스태프에 회계사를 포함시켜 1일 회계 보고를 해야 한다든가 하는 점은 창작이 본업인 예술가에게는 결코 가볍지 않은 짐인 것이다.

 

홀로 최고가 아닌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을 꿈꾸다

부천에서 활동한지 30년이 다 되어 가는데요. 지인들이나 제자들 중에서 기대하지도 않았던 활동가들이 등장할 때, 20, 30대 세대에게서 아직 무어라 정의할 수는 없지만 세상을 바꿀 수 있을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오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 때, 그런 순간들이 제게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겠다 하는 희망을 줘요.”

굳이 자주 바뀌는 정책 탓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예술이라는 것이 애초에 한 세대가 가기 전에 그 성과를 볼 수 있을지 어떨지를 알 수 없는 분야이기도 하다. 예술가라는 것이 어쩌면, 단순히 자유로운 존재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홀로 시간을 앞서 살아가는 존재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는 해도 30년이면 짧은 시간은 아니다. 그 시간 동안을 이런저런 불편 속에서도 꾸준히 그림을 그리고 그림으로 사람들을 만나며 지낸 보람을 이제 조금씩 찾게 되는 것일까. 그림을 그리면서 겨냥했던 바가 그러했듯, 희망은 아직 화가들의 마음을 쫓아오지 못하는 정책이나 제도에서가 아니라 그간 만났던 사람들에게서 보인다고 한다.

캔버스와 아틀리에를 벗어나 거리에서 벽화로 사람들을 만나며 생각했던 것이 미끈하고 튼튼한 다리를 놓는 것이었다면,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 실제로 놓을 수 있었던 것은 아직은 듬성듬성 성긴 징검다리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세찬 물살에 위태로운 징검다리라고 해도 건널 사람은 건너는 법이고, 그렇게 개울을 건넌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더 튼튼한 다리를 놓을 수 있는 법이다. 요즘 그는 다음 세대의 젊은이들을 보며 징검다리를 건너도 희망이 보이는구나하는 생각을 새삼 느낀다.

대학생 시절 부천에 들어와 부천을 벗어나 본 적이 없으니 다른 지역이야 어떤지 잘은 몰라도, 부천에 살면서 느끼는 부천시민들의 높은 학습열을 생각할 때면 그 희망은 더 커진다. 지금의 그에게는 그저 답답한 구석이고 때로는 방해물인 이런저런 점들이, 다음 세대에는 보고 배우는 타산지석이 될 것이다. 윗세대의 아슬아슬한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몸으로 느낀 바들이 다음 세대가 튼튼한 다리를 짓는 데 피가 되고 살이 될 것이다.

부천이 최초는 많은데 최고는 없다고 푸념 아닌 푸념을 하면서도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머문다. 홀로 최고의 자리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사는 것이 꿈인 탓이다. 보고 따라하는 사람이 더 잘하기 마련이라며, 오늘의 부천에서는 시행착오로 그칠지 모를 수많은 시도들이 내일의 부천, 내일의 전국 방방곡곡에서 다른 누군가의 손에서 빛을 보기를 즐거이 꿈꾸는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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